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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와 철학(인공지능)

23. AI와 피로사회 | 효율이 만든 소진

공명(Resonance) 2025. 10. 17. 21:21

AI와 피로사회 AI는 효율을 표준화하고 속도를 규범으로 만들었지만, 그 대가로 인간의 소진과 자기 착취를 확산시켰다. 피로사회의 구조와 회복 전략을 고찰한다.

고민하는 인간을 위로하는 AI(인공지능)로봇

 

효율의 표준화와 보이지 않는 피로

AI는 인간의 노동 개념을 근본적으로 다시 썼다. 한때 생산성은 인간의 땀과 시간을 기준으로 측정되었지만, 이제는 알고리즘이 초 단위로 계산하는 효율성의 문제로 바뀌었다. 데이터는 실시간으로 수집되고, AI는 예측과 판단을 자동화한다. 은행의 대출 심사, 병원의 진단, 공장의 로봇팔까지 모두 ‘지능적 계산’의 이름 아래 운영된다. 그러나 이 놀라운 자동화의 진보는 인간에게 보이지 않는 피로를 남겼다.

 

 

성과사회의 문법과 자기 착취의 구조

성과사회에서 인간은 더 이상 타인의 명령에 의해 움직이지 않는다. 대신 자신을 스스로 동기부여하며, 자신의 효율을 관리하는 존재가 된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외부의 착취자가 아닌, 자기 자신에 의해 착취당한다. 한병철은 『피로사회』에서 이렇게 썼다.

“성과주체는 동시에 주인이며 노예다.”

AI는 인간의 노동을 대체한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스스로를 끝없이 개선하도록 강제하는 거울이 되었다. 효율을 향한 충성은 성과를 올려주지만 마음의 여백을 축소한다. 업무는 끝나도 대시보드는 남고, 기계는 잠들지 않기에 인간의 휴식은 늘 미루어진다.

 

 

자동화의 역설 — 피로의 분배와 은폐

AI는 피로를 제거하지 못한다. 오히려 분배하고 은폐한다. 자동화 시스템이 전면에 나서면 “사람이 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 생기지만, 실제로는 더 빈번한 모니터링과 더 잦은 개입 요청이 발생한다. 경보 임계치가 낮아지면 사소한 변동도 알림으로 솟구치고, 인간은 그 알림을 닫는 데 에너지를 쓴다. 회의는 짧아졌지만 더 자주 열리고, 문서는 요약되었지만 더 많이 작성된다. 숫자가 언어를 압도하는 환경에서는 판단이 아닌 반사가 늘어나 속도는 높아지지만 정확한 이해는 얕아진다.

 

 

데이터 규율 — 보상과 투명성의 역효과

데이터는 규율이 된다. 스마트워치는 심박과 수면을, 생산성 앱은 키 입력과 집중시간을, 커뮤니케이션 툴은 가시성과 반응속도를 기록한다. 이 기록은 평가가 되고, 평가는 목표가 되며, 목표는 다시 행동을 조율한다. 미셸 푸코가 말한 규율 권력은 오늘날 데이터 피드백 루프로 작동한다. 보상과 알림은 도파민으로 설계된 미세한 당근이며, 사용자는 스스로를 순환고리에 묶는다. 한병철은 『투명사회』에서 지적한다.

“투명사회는 타자의 가능성을 제거한다.”

모든 것이 보이는 체계는 숨을 틈, 실패할 틈, 미완의 생각을 보호할 틈을 줄인다. 그러나 사유의 깊이는 종종 그 틈에서 발생한다. 불확실성과 우연성은 오류가 아니라 창의의 발아점이다.

 

 

리듬·깊이·여지 — 회복을 위한 설계

그렇다면 무엇을 회복해야 하는가. 첫째, 리듬이다. 기계의 리듬은 일정하고 장시간 지속되지만, 인간의 리듬은 주기와 변화가 필수다. 알림을 배치로 묶고, 깊은 작업 시간을 보호하며, 회의의 빈도를 줄이는 조직적 설계가 필요하다. 둘째, 깊이다. 요약과 추출을 AI에 위임하되 최종 판단은 인간의 맥락 판단으로 귀결되도록 구조를 바꾸자. 모델 결과에 반증 질문과 대안 탐색을 의무화하면 속도 중심의 의사결정이 의미 중심으로 회귀한다. 셋째, 여지다. 효율의 공백은 낭비가 아니라 통찰의 장치다. 빈칸이 없으면 새로운 문장은 들어올 수 없다.

 

 

성찰 — 속도가 아닌 방향의 회복

AI는 우리의 노동을 대체하기보다 우리의 사고 습관을 형성한다. 결국 문제는 도구가 아니라 사용법이다. 효율을 위한 기술을 의미를 위한 기술로 되돌리는 작업은 설계의 문제이자 윤리의 문제다. 피로사회에서 자유는 속도의 반대말이 아니라 방향의 회복이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른 채 빨리 가는 능력은 능력이 아니다. 멈추어 방향을 고르는 결심, 느리더라도 단단한 합의를 만드는 과정, 책임을 숫자가 아닌 언어로 서술하는 습관이 필요하다.

우리는 AI를 이용해 더 잘 일하고 있는가, 아니면 AI의 문법에 순응하며 쉬는 법과 생각할 틈을 잃어가고 있는가? 오늘의 선택이 내일의 리듬을 만든다. 효율은 도구로 남고, 인간은 주인이 되어야 한다. 그때 비로소 기술은 우리를 대체하지 않고, 우리를 회복시킨다.